곤 前 닛산 회장, 보석 중 일본 탈출해 레바논으로 도주

곤 前 닛산 회장, 보석 중 일본 탈출해 레바논으로 도주

레바논TV "악기 가방에 몸 숨겨 탈출"… 日당국 출국 사실 몰라
사법 시스템 농락당해… 곤 "일본 사법 시스템의 인질 안될 것"

/AFP 연합뉴스
일본 검찰에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카를로스 곤〈사진〉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이 재판을 앞두고 레바논으로 도주했다. 일본 출입국 당국과 검찰은 곤의 출국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스타 CEO(최고경영자)이자,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거물 형사 피의자가 버젓이 국경을 빠져나감에 따라 일본의 국가 시스템이 뚫렸고, 사법 시스템이 농락당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곤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도착한 뒤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 유죄를 미리 단정하고 기본적인 인권마저 부정되는 일본 사법 시스템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에서는 차별이 만연하고 인권이 침해되었고, 일본이 준수해야 할 국제법이나 조약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며 일본의 사법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나는 정의로부터 달아난 게 아니라 불의와 정치적 기소로부터 해방된 것"이라며 "이제 나는 언론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돼 다음 주부터 (언론 접촉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도쿄에 머물고 있던 곤이 어떻게 레바논으로 갈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다. 그는 지난 4월 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될 당시 여권을 반납했으며 해외 출국이 금지됐다. 일본의 출입국 재류관리청 기록에도 곤의 출국 기록이 없다. 일본 검찰은 "사실 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레바논의 MTV는 곤이 성탄절에 자신의 자택에서 작은 음악회를 연 뒤 대형 악기 운반 가방에 몸을 숨긴 후, 일본의 지방공항을 통해서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또 베이루트에 입국 후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도 면담했다고 전했다. 곤은 이곳에 소유한 자신의 자택에 머물고 있으며 무장한 민간인들의 경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곤이 세계 2위 자동차 그룹 회장에서 피의자→도망자로 전락한 것은 한 편의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곤은 2018년 일본 검찰에 체포될 때까지만 해도 '카리스마 경영자'로 불리며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1999년 경영난에 처한 닛산자동차의 최대 주주가 된 르노자동차에서 일본에 파견된 후, '닛산재건계획(NRP)'을 성공시켰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인력 감축을 밀어붙인 구조조정 끝에 회사를 정상화해 일본에서는 '곤 사마(樣)'로 불렸으며, 세계 자동차업계에서도 스타 CEO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굳혔다.

그의 추락은 갑자기 찾아왔다. 2018년 11월 외국 출장을 마치고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택 구입 대금을 회사에 부담시키고 유가증권 보고서에 자신의 보수를 약 91억엔(약 960억원) 축소 기재했다는 혐의 등으로 전격 체포됐다. 최장 15년형까지 받을 수 있는 혐의였다. 닛산 측은 "곤 회장의 중대한 부정행위가 드러났다"며 그를 해임했다.

그러나 곤에 대한 체포가 닛산의 내부 고발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일본의 순혈주의가 낳은 내부 반란'이라는 분석이 일본 안팎에서 제기됐다. 곤이 각각 독립 경영을 해오던 르노와 닛산의 경영 통합과 합병을 추진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닛산의 일본인 경영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의혹이다. 일본 검찰의 가혹한 피의자 다루기도 논란이 됐다. 곤은 2018년 11월 체포된 이후 120일 이상 구금돼 있다가 작년 3월 10억엔을 내고 풀려났으나, 검찰은 4월 또다시 그를 체포했다. 결국 추가로 5억엔을 내고서 또 보석으로 풀려났다.

곤이 레바논으로 도피한 것은 그의 혈통과 관련이 있다. 그는 '레바논계(系)로 브라질에서 태어난 프랑스와 레바논 국적을 가진 비즈니스맨'이다. 레바논은 그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고 지금도 많은 친척이 현지에 살고 있다. 2017년에는 그의 얼굴을 넣은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고, 2018년 그가 체포되자 수도 베이루트에는 "우리가 모두 카를로스 곤이다"라는 광고판이 등장하기도 했다. 레바논에는 "국민 영웅 곤이 부당하게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본과 레바논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 일본 정부가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한다고 해도 레바논 정부가 곤을 일본에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검찰과 곤의 대결은 이제 일본 재판정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본격 시작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주일(駐日) 레바논 대사관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외교 문제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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