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 日 외교관의 명성황후 암살 고백 서한 발견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 日 외교관의 명성황후 암살 고백 서한 발견 ​ 일본은 ! 한국의 황후를 시해하고 석유를 뿌려서 시신을 태운후~~~! 황후를 죽이는게 너무 쉬웠다고 말하고 있다~~! ​ 이것이 바로! 한국의 어린소녀들을 ~~일본은 강제로 잡아가서 군 위안부로 삼은~~~! 오늘날 일본의 양심을 대표한다~~~~! ​ ​ ​ ​ "생각 외로 너무 쉬워 놀랐다" 감상까지 ​ ​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사건 다음 날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시해 정황을 자세하게 밝힌 서한이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역사가들은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평가한다. 보도에 따르면 서한은 암살 실행 그룹의 일원이었던 현지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1895년 10월 8일 암살을 실행한 다음 날 고향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현 나가오카시)에 살고 있는 친구이자 한학자 다케이시 사다마츠(武石貞松)에게 보낸 것이다. 1894년 11월 17일 자부터 이듬해 10월 18일 자까지 총 8편의 편지가 발견됐는데, 이 중 여섯 번째 편지가 사건 다음 날인 10월 9일 자다. 이날 편지에는 시해 현장에서 자신이 취한 행동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진입은 미리 담당한 대로. 담을 넘어 점차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저택에서 안쪽에 있는 건물. 부인이 거주하는 곳)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습니다”라고 암살 사실을 밝히고, “생각 외로 너무 쉬워서 오히려 놀랄 정도였습니다”라는 감상도 곁들였다. 서한을 검토한 김문자씨는 “사건의 세부나 가족 등에 대한 기술을 보더라도 본인의 진필이 틀림없다”면서 “현역 외교관이 부임지의 왕비를 시해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서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아직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은 한반도와 일본 관계사에 정통한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대 명예교수(일본근대사)의 평가도 전했다. 나카쓰카 교수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쇼와 시대와 대비해 긍정적으로 말하기 쉽지만,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면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사건 후 120여 년이 지나 당사자가 쓴 1차 사료가 나온 의미는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현지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고로 당시 일본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미우라 공사 등 관련자 48명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모두 석방됐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 8명도 모두 무죄 방면되는 등 당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 도쿄= 최진주 특파원 pariscom@hankookilbo.com "명성황후, 우리가 죽였다..쉬워서 어안 벙벙" 日외교관 서한 발견 주조선 영사관보, 사건 다음날 절친에게 쓴 편지 내용..소회도 담겨 사건 당사자 1차 자료 공개 매우 의미..세부사항 밝혀줄 중요 열쇠 애국국민운동대연합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경복궁 건천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을 맞아 일본을 규탄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2015.10.8/뉴스1 © News1 양동욱 기자 (서울=뉴스1) 정윤미 기자 = 126년 전 일본 군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이 공개됐다고 아사히신문은 1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서한 작성자는 "담장을 넘어 점차 어전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며 자신의 행동을 상세히 기록해놨다. 아울러 "의외로 쉬웠고,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다"는 소회도 밝혔다. 해당 서한은 시해 실행 단원이었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 당시 주조선 영사관보가 사건 다음 날 적어서 자신의 고향 친구이자 한학자 다케히코 사다마쓰(武石貞松)에게 보낸 것이다. 호리구치가 다케이코에게 1894년 11월17일부터 1895년 10월18일까지 보낸 총 8통 중 6번째 편지에 해당했다. 이는 나고야(名古屋)시(市)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スティーブ長谷川·77)에 의해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됐다. 이어 책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 저자이자 역사가 김문자씨 판독 결과 편지 보관 장소, 기록 내용, 소인(消印), 봉서(封書) 작성 등으로 보아 본인 친필로 보인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김씨는 "사건의 세부 사항이나 가족에 대한 기술 등을 보더라도 작성자 친필이 틀림없다"며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은 이 사건의 세부 사항을 밝혀주는 가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사히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 청(淸)과 러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상세 연구는 이제 막 진행 중이며 현대 일본인들에게 이 같은 인식은 희박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126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 사건 당사자의 1차 자료가 공개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으며 사건 전말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아사히는 전했다. 한편 1895년 10월 8일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그해 9월 조선공사에 취임한 조슈(長州)번(藩) 출신 군인 미우라 고루(三浦梧樓)가 주도했고 실행단에는 일본 외교관과 경찰, 민간인들이 포함됐다. younme@news1.kr Copyright ⓒ 뉴스1코리아 www.news1.kr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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