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왔다, 세계가 우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이 손을 내밀었다

탈레반이 왔다, 세계가 우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이 손을 내밀었다 ​ 해와나가서 위험에 처한~~~!자국 국민도 내팽개치던~~~한국의 위상은~~! 요즘~~! 높아졌다~~! ​ 그것은 인도적~~한국에 도움을 줬던 참전용사들을 챙기고~~~아프간에서 한국을 도왔던 아프간인들을 위험에서 구조한 한국정부의 인도애 적인 행동은~~! 위험에서~~구출된 아프간인들에게~~~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 벌써 4년이 흘렀나? 우리의 어린학생과 세월호에 탑승한 304명의 침몰자를`~ 우리 정부는 어떤 태도로~~방관 했던가? ​ 대통령의 머리 손질만도 못한 304명의 희생자들의 목숨 값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 ​ ​ [한겨레S] 기획 _ 카불 한국대사관 통역사 하레스 인터뷰 “한국의 관대함과 결단에 감사…장차 아프간인 삶 개선 돕고파” 한국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파르완주 지역재건팀(PRT)과 대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하레스(왼쪽)가 지난달 25일 카불 공항에 들어간 뒤 탈출을 도운 김일응 한국대사관 공사참사관(오른쪽)과 함께 서있다. 하레스 제공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8월15일, 하레스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는 집에서 탈레반을 피해 숨어 있었다. 카불 함락 소식에 그는 “충격과 분노, 그리고 우울”에 빠졌다.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1주일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20년 전 자신이 겪었던 ‘탈레반 치하의 삶’을 떠올리며 절망에 빠져 있던 하레스에게 며칠 뒤 한국 외교관이 연락을 해왔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서 운영한 지역재건팀(PRT)과 한국대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그를 잊지 않은 것이다. ​ 희망의 동앗줄을 붙잡고, 하레스는 어린 세아들, 아내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기적처럼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자가격리를 마치고 이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이메일과 SNS를 통해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바꿔놓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과거 탈레반 치하에서의 삶, 그리고 아프간의 현실에 대해 아프간인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한국 외교관들과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길 바랬다. 다만, 아프간에 남은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 우려 때문에 가명을 사용했고, 얼굴을 가린 사진을 쓸 수밖에 없는 데 대해 그는 독자들의 양해를 구했다.―아프간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해 어떤 업무를 했나.“2010년부터 2012년까지 파르완주의 한국PRT(지역재건팀)와 카불 한국대사관에서 통역사와 행정 직원으로 일했다. 아프간 정부기관과의 소통 업무, 한국과 아프간인들 사이의 연락, 회의와 행사 등에서 통역을 했다. 한국인들은 군 호위 없이는 특정 지역 밖으로 갈 수 없어서, 내가 대사관과 지역재건팀을 오가며 중요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한국인들과 일하는 동안 나는 외부인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 식당에서 나란히 앉아 식사를 했고, 한국 PRT 대표와 함께 베트민턴을 쳤다. 그들은 아프간 현지 직원을 차별하지 않고 가족처럼 대했다.”―한국인들의 활동을 아프간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나.“많은 아프간인들은 한국인들이 서양인들과 달리 예의바르고 신뢰할 수 있으며, 숨겨진 정치, 군사적 의도가 없이 진심으로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이 재건을 맡은 파르완주에서 교육, 보건, 농촌 진흥, 직업 훈련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도와 주었다. 한국직업훈련센터에서 청소년들이 취업에 필요한 이론, 실무 교육을 받았고, 외딴 마을에 학교, 병원, 다리도 지어주었다. 한국이 운영한 병원의 진료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파르완주 곳곳과 카불은 물론 파키스탄·이란과의 국경지대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당신이 경험한 탈레반 치하의 삶은 어땠나.“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이 통치했을 때 그들은 가혹한 샤리아(이슬람법) 해석을 강요했고, 전쟁 포로를 학살했다. 나는 절도와 간통 혐의로 붙잡힌 남성과 여성들이 공개 처형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내 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탈레반은 여성 의사 진료는 금지하면서도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는 가지 못하게 해서, 어머니는 아팠을 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사람들은 모두 가난해졌다. 나는 그 때 어린 학생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온갖 힘든 노동을 해야했다. 그래야만 우리 가족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탈레반은 내 동생과 삼촌을 (파슈툰족이 아닌)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2년 동안 감옥에 가뒀다. 탈레반은 타지크인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 저항군의 일원이라는 강제 자백을 받아내려고 내 동생의 손톱을 뽑았고 삼촌의 이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했다. 탈레반은 파슈툰족 종족민족주의 단체이며, 타지크, 하자라, 우즈벡 등 아프간 사회의 다른 부족과의 공존을 믿지 않는다. 탈레반은 소수민족 여성을 납치해 파키스탄에 성노예로 팔았고, 여성을 억압하고, 현대식 교육을 금지하고, 타지크, 하자라, 우즈벡인들의 집을 수없이 파괴했다.”―당신은 어떻게 한국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되었는가“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 아버지는 국제기구에서 새 직장을 찾았고 누이들은 다시 학교를 다니며 좋은 성적을 받았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꿨다. 그런데, 2006년 갑자기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프간 사회에서 장남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나는 집세와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영어와 컴퓨터를 가르치던 한국인 교수가 있었다. 어느날 수업이 끝난 뒤 그는 왜 내 영어 과제가 이전만 못한지 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내 상황을 이야기한 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학을 그만둬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잠시 함께 걷자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들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나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였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서독, 중동,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가서 피땀을 흘렸고, 모두들 밤낮 없이 일해 나라를 재건하고 아이들을 교육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인들도 지금의 아프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며, 이런 어둡고 힘든 날들은 곧 지나가고 훨씬 밝은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고 한국에 매료되었다. 그의 조언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는 내가 공부를 계속하라고 격려했고, 교육부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 주었다. 내가 한국 정부기관에서 일하려고 결심한 이유는 한국의 기적 같은 발전이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 교육, 보건, 농촌 그리고 사회 발전에 대한 노하우가 아프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 하레스가 통역으로 일하면서 파르완주 지역재건팀 사무소, 힌두쿠시산맥의 사업 현장, 지역 경찰서 등에서 한국 외교관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직원 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안전을 위해 몇몇 얼굴을 가렸다. 하레스 제공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나는 그때 탈레반을 피해 집에 숨어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아프간 정부에서 농촌 개발 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카불이 함락되기 전에 내 고향은 이미 탈레반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카불 함락을 들었을 때 충격, 그리고 분노와 우울을 느꼈다. 세계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탈레반 치하에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거의 1주일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내 앞에는 끝없는 비참함만 있는 것 같았다.―어떻게 한국 정부와 연락을 해서 탈출할 수 있었나.“며칠 뒤 한국대사관의 김일응 공사참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한국 정부에서 우리를 철수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왓츠앱으로 PRT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단체연락방을 만들었고 한국 대사관과 소식을 주고 받으면서 카불 공항까지 갈 안전한 루트, 탈출 작전을 의논했다. 공항에 진입하기로 정한 날 하루 전에는 카불공항으로 가 모든 입구를 확인해 대사관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공항까지는 어떻게 들어갔나.“세 번의 시도 끝에 공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시도에선, 서류를 보여주고 들어가려고 공항의 군 출입구로 가려 했지만, 엄청난 인파에 막혔다. 미군 병사들은 최루가스를 쏘았다. 우리는 거의 10시간을 서 있었지만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은 총성에 겁을 먹고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탈레반 대원들이 다가와 허공에 총을 쏜 뒤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그 곳을 떠나라고 했다. 나는 탈레반 대원에게 말을 걸고 서류를 보여주려 했지만, 그들은 곤봉으로 내 어깨를 때렸고, 아내가 나를 데려가려 하자 내 아내도 때렸다. 두 번째 시도에서 우리는 다른 출입구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많은 인파, 최루가스, 총성과 탈레반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 뒤 우리는 카불공항 안에 있던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연락해 상황을 알렸다. 대사관 직원들은 카불 시내에서 공항까지 올 버스편을 마련했다. 8월24일 새벽 4시 우리는 버스에 탔지만, 공항 입구를 지키던 탈레반은 15시간 동안 우리 버스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내릴 수도, 창문을 열 수도 없었다. 버스 안은 대단히 더웠고 아이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그때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8월25일 아침 6시에 우리는 마침내 공항에 들어갈 수 있었다.”―비행기가 마침내 카불공항을 이륙할 때 무슨 생각을 했나.“그 순간 너무나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내 나라를 떠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루려했던 모든 것들과 꿈들을 남겨둔 채 떠나야 했다. 동시에, 안심이 되면서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한국 정부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이곳(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는 데 감사하고, 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한국대사관의 김일응 정무참사관을 비롯한 외교관들은 대사관이 급하게 철수할 때 ‘반드시 해결책을 마련해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완벽하게 지켰고,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해 철수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힘든 상황에 처한 아프간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보여준 한국의 관대함과 결단이 국제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아프간의 소식을 듣고 있나.“가족들과 계속 긴밀하게 연락을 하고 있다. 그들의 안전이 너무 걱정스럽다. 내 고향에서 탈레반은 미국과 우방국들을 위해 일한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업과 상점들은 계속 문을 닫고 있고, 정부와 비정부기구 직원들은 봉급을 받지 못한 채 숨어 있고, 사람들은 치솟는 식료품 가격과 은행의 화폐 부족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탈레반이 점령하기 전에도 아프간 경제는 불안했고 해외 원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농촌은 2년 연속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탈레반이 정권을 차지한 뒤 해외 지원이 끊겼고 아프간 중앙은행의 외화준비금 90억달러는 미국에 동결 되었다. 지금 길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가재도구를 팔려고 애쓰고 있다.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주방도구, 매트리스, 낡은 카페트,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을 누군가 사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내놓고 있다.”―탈레반은 이번에는 인권을 존중하고 극단세력과도 결별하겠다고 말한다.“아프간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지 못한다. (2001년 미국에 쫓겨났던) 탈레반은 2006년부터 일부 지역들을 점령하면서 계속 보복을 저질렀다. 학교나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 사제 폭발물을 설치해 민간인들을 희생시켰고,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억압했고, 진보적인 사람들을 암살했다. 그 모든 잔혹 행위를 목격한 아프간 사람들은 탈레반이 하룻밤만에 변할 거라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탈레반과 이슬람국가 호라산(IS-K), 알카에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미국과의 평화협상에서 탈레반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과의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알카에다를 비롯한 극단주의 단체들은 탈레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얼마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보안 담당 책임자였던 아민 울하크가 탈레반의 호위를 받으며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돌아와 탈레반 지도부에 합류했다. 탈레반은 중앙집권화된, 통합된 세력이 아니고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여러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이 모여 있다. 그 중 일부 지도자들은 경제 지원과 국제적 인정을 받기 위해 UN과 서방 국가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극단주의 세력과의 연결 고리를 끊기를 주저하고, 온건한 정책을 실행하거나 인권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데도 회의적이다.”―지난 20년의 재건 과정은 아프간인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나.“많은 소녀들, 여성들이 학교·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 접속과 휴대폰 사용도 크게 늘었고, 많은 상업은행들이 문을 열고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1인당 GDP도 올랐다. 하지만, 다국적군과 탈레반의 전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부패는 심각했고, 정부 안에는 친족을 등용하는 정실인사가 만연했다. 탈레반이나 다른 극단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파키스탄·이란 등 주변국들의 개입도 증가했다.”―탈레반이 이토록 급속하게 아프간을 장악한 이유는.“가장 주요한 이유는 2020년 2월 미국 트럼프 정부가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이다. 이 합의에서 아프간 정부와 여성, 시민사회는 배제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5000명의 가장 유능한 탈레반 전투병들이 석방돼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군이 공군 지원과 아프간 병사들에 대한 보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공군 지원에 익숙해 있던 아프간군은 공군력이 없는 가운데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랐고 결국 전장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프간 정부가 무너진 것은 군사적 원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치인들과 미군이 아프간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아프간 정부군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당신과 동료들이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카불공항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다.“너무나 큰 비극에 비통했다. 그 공격이 벌어지기 이틀 전에 나는 가족, 그리고 수많은 아프간인들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 그 애비게이트를 통해 공항으로 들어가려고 10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틀 늦었다면 그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슬람국가 호라산(IS-K)는 이 테러를 저질렀고,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들은 탈레반이 이슬람의 적인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위해 지하드(성전)를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탈레반도 변절자로 간주하며, 자신들의 이슬람 율법 해석에 따라 탈레반과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 믿는다. 아프간 사람들은 외국 군대가 철수한 뒤, 이슬람국가 호라산이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해 탈레반과 새로운 전쟁을 벌이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다.”―탈레반이 중국과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하나.“최근 인터뷰에서 탈레반 대변인은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회복하기 원한다며, 중국은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고 말했다. 아프간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허브이고, 보석, 구리, 석유, 금등이 풍부한 세계 최대 천연자원 매장국 중 하나다. 중국이 탈레반을 공식 인정하려는 이유는 아프간 최대의 구리 광산인 메스 아이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수백기의 불교 사리탑이 있고 고고학자들은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발굴하고 있다. 탈레반은 문화 유적을 무시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구리 광산을 개발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서도 아프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프간인들은 조만간 저항세력을 결성해 탈레반과 그들을 지원하는 중국, 파키스탄, 러시아 등에 맞서 싸울 것이다.”―진천에서의 생활,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이곳 관리자들은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무척 훌륭하게 지원해주고 있다. 나는 이전에 한국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지만, 가족들은 아직 한국이 낯설고 날씨, 음식, 언어 등 여러가지로 적응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한국어를 배우고, 이곳에 정착해서 일하고 싶다. 다른 많은 부모들처럼 나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아프간의 상황이 나아진다면,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아프간 사회의 모두가 미래 세대를 위한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프간인들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아프간 상황이 나아진다면, 나는 외교관으로 일하고 싶다. 주변국들과 긍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분쟁을 방지하고, 해외 원조를 유치하고 경제 성장을 도모해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역할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 ​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1011307.html#csidxafe136c8ad65c7aac2f46f37aceae71 ​

댓글

가장 많이 본 글